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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3. 13世 〉13. <부정공>통덕랑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휘시억묘표(通德郎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諱時億墓表)
1. 문헌 목록 〉13. 13世 〉15. <부정공>학생공휘시일묘갈명(學生公諱時一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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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부정공>진사증통훈대부호조좌랑준회광휘시일행장(進士贈通訓大夫户曹佐郎遵晦公諱時一行狀)
進士贈通訓大夫户曹佐郞遵晦公諱時一行狀附墓碣銘 公諱時一字子健號野遺又號遵晦實尤齋先生所命名者系出玉川麗季有諱元吉與圃隱諸公定策恭讓以勞封玉川府院君公其后也有以前副正罔僕我朝杜門以終 世宗朝命旌其閭者曰虔谷公瑜是生吏曹參議斯文參議公生相好亭智崙官察訪察訪公生直長穩直長公生縣監淑瓘是公高祖曾大父諱大成梅窓處士與晴莎鄭公沼相友善歿而饗晴莎祠大父諱惕皇考諱晛謹守家法咸有隱德稱妣木川張氏忠毅公諱潤外大父也公生 萬曆丙午三月十五日幼聰穎絶群七歲讀小學九歲受尚書略通大旨癸酉陞上庠則以宋先生同年造其門以親炙甞遊我叔祖畸菴文貞公之門趣向之正己有如此者逮夫丙子之變畸菴公當號召使公與族第時述元謙糾合義旅以從至清州己媾和痛哭而歸甞有詩曰可惜新年至王孫幾日回天涯草又綠樽酒不堪開此戊寅元夕也時兩大君滯于北庭故耳本倅朴尚書遾驚賞曰都是忠義肝膽自後孫不復就公車而終 肅廟庚午三月八日皐復壽八十有五墓于順天雙巖面書堂洞之先兆下坐艮原公有至行奉侍偏慈志軆之養俱到事無大小必咨禀而後行前後喪皆廬墓盡制尤謹於祭祀齊沐蠲潔罔或不虔如見其所爲齊者晚節以導迪後進爲己任每語學者曰人不學不知道道豈彛倫常行之外父子君臣迺其大者欲求其道莫先乎小大學其學又莫要乎用敬如九容九思之目罔非是也公妹梁夢羲之妻公事之甚謹逮其夫沒截髮毀其面廢食自盡公痛傷之撫育其孤如己之子忠毅公晋陽殉節朝廷褒錄與金倡義崔慶會黃進諸公不無差殊迹公慷慨叫閽以及易名以及宣額竟無讓諸公者戊午爲老先生伸救遂力疾赴儒會詩山中道疾劇使其孫捄族孫弼文替行公可謂尤翁之血黨也壬癸間寇盜竊發所至艮民被其脅從剽掠之禍士族家鮮有免焉至公曰趙公仁人不可犯也至誠之動人類如此矣公娶林氏扶安籍訓錬主簿盖國之女 萬曆丁未四月四日生 顯廟壬寅七月五日終墓祔公之左有三男一女男長曰有源次曰有恆出女適安珪有源男曰搏女適李倜次適林重錫有恆男曰捄曰撝曰金繕曰奇涑二女婿也搏系子德命援生德命出錫命復命彦命出俊命女許繪尹思曾捄生鼎命泰命有文行壽至僉樞晋命女朴崇華林煦李璜撝生龜命胤命餘不錄詳夫公於我尤齋先生受知深矣曰野遺與其賢也曰遵晦實養勇而俟時也意此書之出必在乎丹墀獨對而後成異日潦薊風霜與子同袍之意微可見矣公語是乎足死矣泳黙公之貽厥也日袖公事實一通以來謁不佞以狀曰墓文尚徯當世立言之門其如狀闕曷願公垂惠我先公不佞辭不文乎然有可言者存不佞곘既彌甥乎公家又幸徃哲之隧賴而文之垂諸無窮則亦後死責也敢忘醜差耄言謹撮其大者如右以俟君子之采擇焉 彌甥烏川 鄭곘 謹狀 진사증통훈대부호조좌랑준회광휘시일행장(進士贈通訓大夫户曹佐郎遵晦公諱時一行狀) 공의 휘는 시일(時一), 자는 자건(子健), 호는 야유(野遺)인데 또 다른 호가 준회(遵晦)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옥천 조씨로 고려 말 휘 원길은 포은선생 등과 함께 공양왕을 정책한 공으로 옥천부원군에 봉해졌는데 공은 그의 후손이다. 전부정(前副正)으로 절의를 지켜 문을 막고 고종하니 세종 때 정려가 내린 건곡공 유(瑜)가 있고, 그분이 이조 참의 사문을 낳았다. 이조 참의공이 상호정 지륜(智崙)을 낳았는데 벼슬은 찰방을 지냈으며, 찰방공이 직장(直長) 온을 낳았고, 직장공이 현감 숙관(淑瓘)을 낳았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 휘 대성은 호가 매창처사로 청사(晴莎) 정소(鄭沼)공과 서로 친하게 지내 죽은 후에 청사의 사당에서 함께 제사를 받는다. 할아버지는 휘 척(惕)이며 아버지의 휘는 현(晛)인데 가법을 삼가 지키고 숨은 덕이 있다고 일컬어졌다. 비(妣)는 목천장씨(木川張氏)로 충의공(忠毅公) 휘 윤(潤)이 외조부이다. 공은 만력 병오년(一六○六) 三월 十五일에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총명이 남달리 뛰어나 七세 때 「소학」을 읽고 九세때는 「서전(書傳)」을 읽어 대략 그 뜻을 이해하였다. 계유년에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송시열 선생과 같은 해여서 그의 문하에 다니며 친히 가르침을 받았고 일찌기는 나의 숙조(叔祖) 기암(畸菴) 문정공(文貞公)의 문하에서 공부해 나아갈 바를 바르게 정함이 이와 같았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기암공이 호소사(號召使)가 되자 공은 집안 동생인 시술(時述)·원겸(元謙)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여 청주에 이르자 이미 강화조약이 맺어졌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면서 돌아오고 말았다. 일찌기 시를 지었는데, 아! 새해야 어김없이 온다만 可惜新年至 왕손은 언제 오시려나. 王孫幾日回 저 하늘가에 우거진 무성한 풀들 天涯草又綠 허나 술동이를 어이 반기랴! 樽酒不堪開 하였는데, 이 시는 무인년 정월 초하룻날 밤에 지은 것이다. 이때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두 대군이 청나라 조정에 볼모로 있었기 때문에 이를 두고 지은 시다. 본고을 원님 상서(尚書) 박서(朴遾)가 『구절구절이 충의에 가득찬 시이다』 하고 감탄하였다. 이후부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생을 마쳐 숙종 경오년(一六九○)에 졸하는 수는 八十五세였다. 묘는 순천 쌍암면 서당동 선영 아래 간좌(艮坐) 언덕에 있다. 공은 지극한 행실로 어버이를 섬겨 양지(養志)·양체(養体)를 하였고 크고 작은 일 모두를 부모님께 아뢴 후에 행하였다. 부모의 상에는 모두 여묘살이를 해 예법대로 하고, 더욱 제사를 삼가 목욕재계하여 조금도 경건하지 않음이 없는게 마치 그분이 임한 듯하였다. 만년에는 후진을 교육하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삼았는데 배우는 사람에게 매양 말하기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도(道)를 모른다. 도란게 어찌 사람이 지켜야 할 인륜밖의 것이겠는가? 부자와 군신 사이의 도리가 가장 큰 것이다. 그 도를 알고자 하면 먼저 「대학」과 「소학」을 배워야 하고, 그 가운데서도 구사(九思)·구용(九容)의 덕목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하였다. 공의 누님이 양몽희(梁夢羲)에게 출가하였는데 공이 매우 조심스럽게 섬기었다. 매형이 죽자 부인은 머리를 깎고 식음은 전폐하여 자살하였는데 공이 무애 슬퍼하면서 그 고아들을 자신의 아들처럼 길렀다. 외조 충의공이 진양(晋陽)에서 순절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포상했는데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황진(黃進) 제공과 차등을 두니 공이 강개하게 나서서 조정에 하소해 시호를 받고 사액(賜額)하게 하여 이상 제공과 다름 없게 하였다. 무오년에는 노선생(老先生:송시열을 가리킨다)을 구원하기 위해 병을 무릅쓰고 시산(詩山)의 유회(儒會)에 달려가다 중도에서 병이 악화되니, 그의 손자 구(捄)와 족손 필문(弼文)을 보냈으니, 공이야말로 우암과 피로 맺은 관계라 하겠다. 임계(壬癸)년 사이에 도적이 들끓어 그들이 이르는 곳마다 양민들을 협박을 하고 노략질하여 사족(士族)들로서 그들의 화를 면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공의 집에 이르러서는, 『조공은 어진 분이니 침범할 수 없다.』 하였으니, 공의 지극한 정성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은 부안임씨(扶安林氏) 훈련주부(訓鍊主簿) 개국(盖國)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는데 만력 정미년(一六○七) 四월 四일에 출생하고 현종(顯宗) 임인년(一六六二) 七월 五일에 졸하였으니 묘는 공의 왼쪽에 부(祔)하였다.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장남은 유원(有源), 차남은 유항(有恒), 그 다음은 지항(之恒)이며 딸은 안규(安珪)에게 출가하였다. 유원의 아들은 박(搏)·원(援)이며 딸은 이척(李倜)과 임중석(林重錫)에게 출가하였다. 유항의 아들은 구(捄)·위(撝)이며 두 사위는 김선(金繕)과 기속(奇涑)이다. 박의 계자(系子)는 덕명(德命) 援의 생 德命은 出하고 석명(錫命)·복명(復命)·언명(彦命) 出·준명(俊命)인데 언명을 출계하였다. 준명의 딸은 허회(許繪)·윤사증(尹思曾)에게 출가하였다. 구의 아들은 정명(鼎命)·태명(泰命)·진명(晋命)인데 태명은 문행이 있어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이르고 딸은 박숭화(朴崇華)와 임후(林煦)·이황(李璜)에게 출가하였다. 위(撝)는 귀명(龜命)·윤명(胤命)을 낳았고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이 우암 송시열 선생의 지우(知遇)를 받아서 호를 야유(野遺)라 지어주신 것은 그 어짐을 말한 것이요, 또 준회(遵晦)라 한 것은 용기를 길러 때를 기다리게 한 것이다. 생각컨대 이 글이 나온 것은 반드시 우암 선생께서 효종(孝宗)과 독대(獨對)한 후에 나온 것이니, 훗날 청나라를 칠 때 함께 참여시키려는 뜻이 은밀하게 나타나 있다. 그랬으니 공은 흡족하게 죽었다. 영묵(泳黙)은 공의 후손인데 공의 사실 한 통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행장을 청하면서, 『묘갈명은 당세의 대가를 기다려야 하지만 행장이 없으니 공께서 지어주어 우리 선공(先公)을 빛내주십시오.』 하니, 내가 어찌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겠으며 또 할 말도 없지 않다. 나 석(곘)은 공의 집안 미생이어서 다행히 공의 묘소에 가본 적이 있으므로 거기에 힘입어 쓴다. 훌륭한 사적을 무궁토록 전하는 것은 후생들의 책임이므로 감히 늙은이의 망언임을 잊고 삼가 그 큰 사적만을 들어 이상과 같이 기록하여 군자(君子)의 채택을 기다린다. 미생(彌甥) 오천(烏川) 정석(鄭곘)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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